LastUpDate: October 8, 2020

하카타 미니상식 164

의사이자 교육자인 카메이 난메이와 타카바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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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의사이자 교육자로 살았던 두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소개할 사람은 카메이 난메이(1743~1814)입니다. 사와라군 메이노하마(지금의 니시구 메이노하마)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카메이는 어린 시절부터 열심히 공부했고 열아홉 살에 상경해 의학과 유학을 배웠습니다. 그 후 후쿠오카로 돌아와 지금의 토진마치에서 병원을 개업해 의사로 일하며 공부방 ‘카메이주쿠’도 열어 제자를 육성했습니다.


그러한 활동을 통해 좋은 평판을 얻게 되어 후쿠오카번의 유의(儒醫, 유학자이자 의사)로 발탁되었고 신설 기관 칸토관의 초대 학장으로도 취임했습니다. 시카노시마에서 발견된 금인(金印)에 대한 학설을 그 누구보다 빨리 발표하는 등 다양한 활약을 펼쳤지만, 후일 이로 인해 논란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칸토관마저 화재로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여러 곤경에도 불구하고 아들 쇼요와 함께 카메이주쿠를 재개한 결과, 일본 전역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다고 합니다.


이 카메이주쿠에서 공부한 제자 중 한 명이 타카바 오사무(1831~1891)입니다. 후쿠오카번의 안과 의사 집안에서 딸로 태어났지만,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남자아이처럼 교육받았던 여성 유학자였습니다. 카메이주쿠에서 공부를 마친 후 지금의 하카타역 부근 인삼밭터에 공부방을 열었습니다. 카메이 난메이와 마찬가지로 의사이자 교육자로서 일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카메이 난메이와 그의 아들 쇼요의 묘는 추오구 지교의 조만사 경내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절에 남아 있는 정문은 카메이 부자가 활약했던 에도 시대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토진마치의 칸토관터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한편 타카바 오사무의 묘는 하카타구 치요의 소후쿠사에 있으며 카츠 카이슈(무사, 정치가)가 묘비명을 썼습니다. 하카타역 근처 공부방터에도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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医者であり教育者:亀井南冥(かめい なんめい)と高場乱(たかばおさむ)

今回は江戸時代から明治時代にかけての医者であり教育者であった2人の人物を紹介します。1人目は亀井南冥(1743~1814年)です。南冥は早良郡姪浜村(現在の西区姪浜)の町医者の息子として生まれ、幼い頃から勉学に励み、19歳のときに京へ上って医学と儒学を学びます。福岡に戻ると現在の唐人町で医者として開業するかたわら、私塾「亀井塾」を開いて多くの門人を育てました。


やがてその活動が評判を呼び、福岡藩の儒医(儒者兼医師)に抜擢されます。さらに新設された西学問所「甘棠館(かんとうかん)」の初代学長になりました。志賀島で発見された金印についての学説をいち早く発表するなど活躍しますが、後に失脚。さらに甘棠館は焼失して廃止になります。けれども息子の昭陽(しょうよう)とともに亀井塾を再開し、日本全国から門弟が集まったとされます。


この亀井塾から育ったのが高場乱(1831~1891年)です。福岡藩医の眼科医の家に生まれた女性ですが、跡取りの男児がいなかったことから、幼い頃から男として育てられた男装帯刀の女性儒学者でした。亀井塾で学んだ後に、現在の博多駅近くにあった福岡藩の薬用人参畑跡に自身の私塾、通称「人参畑塾」を開設します。亀井南冥と同じく、医師のかたわら教育に携わる道を選びました。


亀井南冥、昭陽の墓は、中央区地行の浄満寺(じょうまんじ)の境内にあります。この寺に残る立派な山門は、亀井親子が活躍した江戸時代に造られたものと伝わっています。また、唐人町にあった西学問所「甘棠館」の跡地には石碑が建っています。高場乱の墓は博多区千代の崇福寺にあり、墓碑銘は勝海舟が書いたものです。また、博多駅近くの人参畑塾跡にも石碑が建ってい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