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로부터 해외와 활발한 교류를 해왔던 하카타는 중세에 접어들며 상업항으로써 번영하게 됩니다. 감합부를 가진 자만이 교역 가능했던 중국 명나라와의 감합무역부터 조선과의 교역, 나아가 류큐를 통해 동남아시아로 무역권을 확대해나갔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큰 힘을 지닌 상인들이 탄생하였고 하카타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자치도시로서 발전했습니다. 특히 유명한 것이 하카타 3걸이라 불리는 카미야 소탄, 시마이 소시츠, 오가 소쿠입니다.
카미야 소탄은 대대로 이어져온 하카타의 상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토요토미 히데토시의 ‘타이코마치와리’에서도 직접 자를 들고 거리를 계측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 후에는 중국과의 무역, 쌀 거래 등에서 하카타 상인 1인자로 활약했습니다. 하카타구 나라야마치에 있는 카미야 소탄의 가택터에는 토요토미 히데토시를 모시는 토요쿠니 신사가 세워졌습니다. 묘소는 하카타구 묘라쿠지에 있습니다.
시마이 소시츠는 오토모 소린, 토요토미 히데토시 등으로부터 신뢰받아 술 양조와 금융업 등으로 부를 일구었습니다. 조선과도 무역을 했으며 하카타에서 츠시마, 조선에 이르는 교통로를 완성했다고도 일컬어집니다. 시마이 소시츠의 가택터에 있던 토담은 하카타베이라 불리는 기와를 사용한 독특한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공습에도 화재를 면해 근처 쿠시다 신사 경내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습니다. 묘소는 소후쿠지에 있습니다.
오가 소쿠는 하카타 출신인 소탄, 소시츠와는 달리 부젠노쿠니 나카츠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카츠 번주인 쿠로다 나가마사가 치쿠젠노쿠니로 이동할 때 하카타로 이주하였습니다. 후쿠오카성 축조, 성시 정비, 사원 복구 등에 힘썼으며 동남아시아와 무역도 했습니다. 쿠로다번의 신뢰도 두터워 오가 가문은 하카타 상인으로서 에도막부 때까지 활약하게 됩니다. 묘소는 쇼후쿠지 겐주앙에 있습니다.
古代から海外との交流が盛んだった博多は、中世になると商業港として栄えるようになります。勘合符を持つものだけが交易できる中国・明との勘合貿易に始まり、朝鮮との交易、さらには琉球を通じて東南アジアにまで貿易圏を広げていきます。その中で大きな力を持つ商人が生まれ、博多は商人を中心とした自治都市として発展しました。とりわけ有名なのが「博多三傑」と呼ばれる神屋宗湛・島井宗室・大賀宗九の3人です。
神屋宗湛は代々博多の豪商の家に生まれました。豊臣秀吉の「太閤町割」でも重要な役割を果たし、自ら物差しを持って通りを計測して回ったとされます。その後は中国との貿易や米の取引などで博多商人の第一人者として活躍しました。博多区奈良屋町の神屋宗湛の屋敷跡は、現在、豊臣秀吉を祀る豊国神社が建立されています。また墓所は博多区の妙楽寺にあります。
島井宗室は大友宗麟や豊臣秀吉などからの信頼を得て、酒づくりや金融業で財を成しました。朝鮮とも貿易を行い、博多から対馬、朝鮮にいたる交通路を築き上げたとされます。島井宗室の屋敷跡にあった土塀は「博多べい」と呼ばれる瓦を使った独特の造りで、第2次世界大戦中の空襲でも焼け残り、近くの櫛田神社境内に移築・保存されています。墓所は崇福寺にあります。
大賀宗九は博多出身の宗湛・宗室とは違い、もともと豊前国中津の生まれです。中津藩主の黒田長政が筑前国に移るのにあわせて博多に移住しました。福岡城の築城や城下町の整備、博多の寺院の復興などに尽力し、東南アジアとの交易も行いました。黒田藩からの信頼も厚く、大賀家は博多商人として幕末まで続くことになります。墓所は聖福寺の塔頭・幻住庵にあります。